공룡호가 사는 세상 이야기

밑줄 긋기

일상다반사2004. 12. 28. 16:35
헌책방에서 산 소설책을 읽다 보면 간혹 먼저 읽었던 사람이 친 밑줄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가령 내가 가지고 있는 책 중에는 신촌의 공씨책방에서 산 문학사상사판 노르웨이의 숲이 있는데, 이 책에는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는 작자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지'란 대목부터 '죽어서 30년이 지나지 않은 작가의 책은 신용할 수 없지'란 대목까지 줄이 그어져 있다. 시니컬하면서도 쿨한 대목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어떤 관점을 한 개의 문장으로 완벽하게 표현해냈다. 뭐랄까, 대사라기 보다는 거의 잠언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줄긋기가 소설을 읽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 걸까.

잠언은, 그야말로 잠언에 불과하다. 그것이 소설 안의 부품으로 녹아들어 있지 않을 때 그 잠언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악법도 법이다' 내지는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땀으로 이루어진다'라는 말들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떨어져 나오면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게 된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소설의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이다. 좀 더 형이하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소설 세계의 제약 조건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소설을 이루는 모든 코드들은 그 속에서만 제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소설 속에서 그토록 잠언을 찾아내려고 하고, 그 잠언에서 교훈을 짜내려고 안달복걸 못하는 것일까. 소설 속에서의 잠언은 형상화를 위한 하나의 재료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거의 틀림없는 진실을 품고 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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