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에서 산 소설책을 읽다 보면 간혹 먼저 읽었던 사람이 친 밑줄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가령 내가 가지고 있는 책 중에는 신촌의 공씨책방에서 산 문학사상사판 노르웨이의 숲이 있는데, 이 책에는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는 작자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지'란 대목부터 '죽어서 30년이 지나지 않은 작가의 책은 신용할 수 없지'란 대목까지 줄이 그어져 있다. 시니컬하면서도 쿨한 대목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어떤 관점을 한 개의 문장으로 완벽하게 표현해냈다. 뭐랄까, 대사라기 보다는 거의 잠언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줄긋기가 소설을 읽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 걸까.
잠언은, 그야말로 잠언에 불과하다. 그것이 소설 안의 부품으로 녹아들어 있지 않을 때 그 잠언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악법도 법이다' 내지는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땀으로 이루어진다'라는 말들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떨어져 나오면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게 된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소설의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이다. 좀 더 형이하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소설 세계의 제약 조건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소설을 이루는 모든 코드들은 그 속에서만 제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소설 속에서 그토록 잠언을 찾아내려고 하고, 그 잠언에서 교훈을 짜내려고 안달복걸 못하는 것일까. 소설 속에서의 잠언은 형상화를 위한 하나의 재료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거의 틀림없는 진실을 품고 있더라도.
잠언은, 그야말로 잠언에 불과하다. 그것이 소설 안의 부품으로 녹아들어 있지 않을 때 그 잠언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악법도 법이다' 내지는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땀으로 이루어진다'라는 말들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떨어져 나오면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게 된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소설의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이다. 좀 더 형이하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소설 세계의 제약 조건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소설을 이루는 모든 코드들은 그 속에서만 제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소설 속에서 그토록 잠언을 찾아내려고 하고, 그 잠언에서 교훈을 짜내려고 안달복걸 못하는 것일까. 소설 속에서의 잠언은 형상화를 위한 하나의 재료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거의 틀림없는 진실을 품고 있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