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호가 사는 세상 이야기

버스타기

일상다반사2012. 4. 3. 22:00

퇴근 길, 버스에 올랐더니 지갑이 없다. 버스는 이미 출발하였는데 기사님께 말씀 드렸더니 다음 정류장에 세워주셨다. 내리라는 것이다. 몇 년에 한 번 겪을만한 일이라 버스기사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버스기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나와 같은 승객을 만날 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나았다. 내릴 때 눈이 마주친 앞자리에 앉은 여고생은 마스크 뒤에서 웃고있음이 분명했다. 왠지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주머니와 가방을 뒤져 보았다. 백원짜리 한푼 없다는 사실을 알고나니 막막해졌다.

사무실로 돌아가 선배에게 2만원을 꾸었다. 다시 한 참을 기다렸다. 내가 기다리는 버스는 배차시간이 길다. 다시 버스에 올랐다. 버스비를 내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서 불현듯 만원짜리는 기사님이 곤란해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현금을 내고 타는 사람이 드물다. 역시나 버스기사는 당황해하며 말했다.

"그냥 타세요"

좀 전에 탔을 때 좀 태워줄 것을. 버스는 만원이었는데 갑자기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껏 돈을 빌려왔는데 무임승차를 하게 되다니. 나는 돈이 있다고.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다. 편의점에가서 잔돈으로 바꾸어 줄 수 있냐고 물었고, 직원이 대답했다.

"어떻게 바꾸어 드릴까요?"

그러고 보니 나는 버스비가 얼만지 모르고 있었다. 나는 정확한 금액을 지불하고 재빨리 자리에 앉는 상상을 했다. 백원 짜리까지 바꾸어야 했는데, 버스비가 얼만지 잠시 생각하는 동안 편의점 직원은 천 원 짜리 열장을 내밀었다. 깜빡 잊어버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에쎄 순 영점 일 미리 한 갑 주시고, 잔돈은 백 원 짜리로 주세요"

주머니에는 칠천 오백 원이 있다. 게다가 오백 원은 잔돈으로 준비되었다. 이제 버스비가 얼마인지만 알면 버스기사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한 번에 지나칠 수 있다. 버스에 올라서서 버스기사에게 버스비를 묻고 주머니에서 지폐와 잔돈을 꺼내어 세는 모습은 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추한 모습은 보이지 않아야 했다. 스마트폰으로 버스비를 검색했다. 내가 탈 광역 버스비는 이천 백 원이었다. 주머니에 있는 백 원 짜리 다섯 개를 만지작 거리며 정류장으로 다시 향했다. 손 냄새를 맡으면 날 것 같은 비릿한 돈 냄새를 상상했다. 

버스가 왔다. 먼저 버스에 올라 탄 사람들은 카드를 대고 자연스럽게 자리를 찾아간다. 나는 현금이지만 그들과 다르지 않게 행동해야 했다. 버스에 한 걸음 올라서서 현금을 받는 통을 보고나니, 정확히 이천 백 원을 맞추어 놓지 않았음이 생각났다. 한 걸음 더 오르며 주머니에 손을 넣고 현금을 모두 꺼내보니 만 원 짜리 한 장, 오천 원 짜리 한 장, 천 원 짜리 두 장, 백 원 짜리 다섯 개가 나왔다. 그 중에 천 원 짜리 두개와 백 원 짜리 1개를 고르는 동안 이미 내 차례가 왔다. 뒤에 있던 사람은 이미 카드를 찍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계획은 실패였다. 마지막에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음에도 치밀한 준비를 하지 못한 탓이었다.

문득 창 밖을 보니 어느 새 버스는 목적지 근처에 와 있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로 환승을 해야 하는데 환승을 하면 다시 버스비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제와서야 깨달았다. 한 번의 기회가 더 있다는 사실도!

마을 버스는 무려 천 원이 싼, 천 백원임을 생각하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앉은 자세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거기다 나는 버스 뒷 바퀴 위에 앉아 있다. 다음 버스비는 내려서 준비해도 늦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혹시라도 천 백원이 아니면 낭패라는 생각에 다시 한 번 버스비를 검색했다. 천 백원이 확실했다. 천 백원.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으리라.

버스는 정류장 근처에 카니발 한 대는 족히 지나갈 만한 거리를 두고 정지했다. 문이 열리고 나는 제일 먼저 내렸다. 혹시라도 그 찰나에 오토바이라도 지나가면 큰 사고가 날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내리면서 우측을 보았더니 환승 해야 할 버스가 바로 뒤에 서 있다. 이런 상황은 고려하지 못했다. 버스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뛰었다. 이미 탈 사람들은 모두 탔는지 버스에 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뛰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천 백원을 만들어야 했다. 어차피 동전은 모두 백원짜리니 자연스럽게 백원짜리 하나를 넣으면서  지폐중에 천 원짜리 하나를 골라 자연스럽게 넣고 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 찰나에도 지갑이 없으니 주머니가 참 지저분해 진다고 생각했다.

버스에 오르자 마자 문이 닫히고 버스가 출발했다. 주머니에 넣은 손을 빼면서 깨달았다. 이미 천 원 짜리를 모두 지불했고, 남은 지폐중에는 천 원 짜리가 없다는 사실을. 결국 버스기사에게 말을 꺼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오 천원 짜리 인데 혹시 거슬러 주실 수 있으세요?"

버스기사는 친절하게 천 원짜리 넉장을 거슬러 주었다. 버스기사의 친절이 배인 미소는 내게 더욱 패배감을 안겨주었다. 두번이나 주어진 기회에서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정류장에 내려 길을 걸으면서 내일 한 번 더 도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루종일 내리던 비는 어느 새 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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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버스타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무척이나 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늘 카드만 찍고 버스를 타다 보니 '자연스럽게 버스타기'를 성공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절차 중 '아주 작은 부분'들을 간과했던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살아가면서 많은 일을 겪는다. 하다 못해 서점에서 책을 사러 갈 때에도 마찬가지다. 책을 사야 할 일이 생기면 막연히 서점에 갈 뿐, 그 책이 교양서적으로 분류되는지, 사회과학으로 분류되는지, 등을 생각하지 않는다. 서점에 도착하면 그제서야 사려고 했던 책이 어떤 분류였는지 생각한다. 그리고 책꽂이에서 책을 무작정 찾기 시작한다. 그렇게 찾아지면 다행인데, 대부분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도서 검색대로 가서 책을 찾고, 표시된 코너로 가서 책을 찾는 과정을 나 또한 늘 반복했다.

서점에서의 책을 고르는데 무슨 프로세스가 필요하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렇다, 서점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을 할 때에도 이런 식으로 한다. 드라이버 부터 돌리고 시작하고, 일단 코드를 짜 보고 시작한다. 그러다 안되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관련 문서를 찾는다. 그제서야 잘못을 깨닫지만, 다음에도 같은 방법으로 접근한다.

적당히 할 일이 아니라면,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일 해야 한다.

마치 '자연스럽게 버스타기'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