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호가 사는 세상 이야기

첫눈 +1
작년엔 눈이 내리지 않았었던가.
첫 눈이 오는데, 왜 눈이 너무 오랫만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지 잘 모르겠다.

10번째 광주 출장.
이젠 여기도 익숙하다. 사람도 거리도 건물들도.
4일째 밤, 잠을 청하기 위해 담배연기가 가득한 방에 차가운 바람을 좀 넣을까. 커튼을 제꼈더니
함박눈이 내린다.

창문을 열고, 그 뒤에 버티고 선 모기장을 제끼고,
위를 봤다, 아래를 봤다.
고개를 조금 내밀었더니 머리에 차가운 그것이 내려와 앉는다.
몇 개 더 내려앉더니 이젠 그것이 녹아서 이마를 타고 코 위로 흐른다.
이마에선 차갑던 것이 코 위에서는 따뜻하다.

눈이 내려 건물들 지붕이 모두 흰색이다.
익숙했던 거리와 건물이 낯설어진다.

문득 뒤돌아 전화기를 들어 보니 새벽 1시가 넘었다.
기역부터 히읗까지 전화번호부를 돌렸는데, 마땅히 전화할 사람이 없다.
형님들 친구들에게 전화해서 눈온다고 호들갑 떨면 이게 오밤중에 미쳤다 할게 분명하다.

이런 날은, 지나간 옛 사랑을 그리워 해 보기도 하고.
유리창이 넓은 까페에서 아메리카노 한잔 마시는 것도 좋은데.
갑자기 낯설어져 버린 여기에, 그것도 혼자서 밖을 나갈 용기는 없고,

거꾸로 히읗부터 기역까지 혹시 놓친 사람은 없는지.
전화번호부를 돌리다가.
씁쓸한 커피 한잔 타서, 키보드를 두드린다.

첫눈이 내린다.
옛날, 아주 옛날에
내가 소년이었던 시절.
첫눈이 오면 거기 그 자리에서 그 시간에, 다시 만나기로 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나는 첫 눈이 오던 날, 첫 눈이 내리는 걸 모르고 있었다.
뒤늦게 알고서 나는 거기에서.
눈이 녹아 옷이 흠뻑 젖을 때 까지 그 사람을 기다렸는데.
끝내, 그 사람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언젠가 부터, 그 사람이 먼저 왔다가 가버린거라고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숙녀가 된 그 사람이 내게 말해 주었다.
그 날, 내가 기다리는 걸 보고선 돌아갔다고.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몰랐다고.

오늘도 첫눈이 내린다.
오늘 만나기로 했을 그 누군가들은,
꼭 다시 만나 손을 잡는 날이 되어라.

커피가 맛있다.
키보드도 좋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서, 눈 밟으면서 출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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