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호가 사는 세상 이야기

오마이뉴스 김은식 기자

▲ 지금도 사직 야구장에 내걸리곤 하는 임수혁 선수의 모습
ⓒ 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갈매기마당)
2000년 4월 18일 LG 트윈스와 롯데 자이언츠가 맞붙은 프로야구 경기가 벌어진 잠실야구장. 2루에 서있던 자이언츠 선수 하나가 갑자기 쓰러졌다. 다른 선수들과 아무런 접촉도 없었고, 심지어 2루에는 상대팀의 2루수조차 있지 않았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양팀 선수들과 관중들이 어리둥절해있던 사이 1루에 있던 용병 우드가 달려왔고, 덕아웃에 있던 트레이너가 쫒아 나왔다. 쓰러진 선수는 의식을 잃은 채 다리를 떨고 있었다.

그를 둘러싼 이들은, 응급조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에 달리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허리띠를 풀고 헬멧을 벗긴 다음 들것에 실어 덕아웃으로, 다시 구급차로, 병원으로 옮겼을 뿐이었다. 그저 아주 더운 날, 무리한 훈련으로 탈진해서 쓰러진 선수에게 늘 해왔던 방식 그대로 말이다.

쓰러진 선수는 이미 프로생활을 시작할 무렵부터 심장 부정맥이라는 지병을 안고 있었다. 가끔 심장의 박동이 불규칙하게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병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그 순간, 심장이 갑자기 아주 느리게 뛰면서 뇌로 올라가야 할 혈액이 부족해졌고 기력을 잃은 뇌는 몸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2000년 4월 18일, 한 선수가 쓰러졌다

▲ 임수혁
ⓒ 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
그래서 그 순간, 그에게 필요한 것은 심장이 다시 힘차게 뛰어 뇌로 피를 보내도록 하기 위한 심장마사지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순간 그런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수와 관중까지 수만 명이 미친 듯이 달리고 환호하고 흥분하는 그 공간에 단 한 사람의 의사도 대기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대로 들것과 구급차 속에 방치된 채 수십 분이나 흔들리며 도착한 강남시립병원에서 간신히 그의 맥박과 호흡을 살려낼 수 있었다. 그러나 좀체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유치원에 다니던 아들이 중학생이 된 지금까지도, 그는 병실에서 초점 없는 눈을 껌벅이며 긴 꿈속을 헤매고 있다. 자이언츠의 '돌아오지 않는 2루주자' 임수혁 이야기다.

고려대 2학년 때부터 줄곧 국가대표로 뛰었을 정도로 그는 일찍부터 인정받은 유망주였다. 묵직한 방망이가 일품이었고, 동료나 후배들을 푸근하게 품어주는 배포와 인정이 포수로서 안성맞춤이었다. 포수로서는 드물게 종종 도루도 성공하는 기동력은 덤이었다.

1994년, 대학 졸업 후 일찌감치 상무에서 병역을 마친 그가 프로무대에 등장했을 때 그의 팀 롯데 자이언츠의 안방은 89년에 입단한 김선일, 그리고 임수혁의 대학 동기였지만 92년 졸업 후 곧바로 입단한 강성우가 지키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주전포수 김선일의 기량이 조금씩 퇴조하면서 강성우의 비중이 높아지고는 있었지만, 허약한 공격력이 두 선수 모두가 가진 약점이었다.

임수혁은 입단 2년차인 95년부터 당장 김선일을 밀어내고 강성우와 함께 주전포수자리를 양분했다. 투수리드와 도루저지 같은 수비 면에서는 강성우가 나았지만, 임수혁은 공격력 면에서 포기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해 임수혁이 때려낸 15개의 홈런은 팀 내에서 신인 마해영이 기록한 18개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것이었다. 스물다섯 개가 홈런왕 가능권으로 통하던 90년대 중반 15개 이상의 홈런은 적지 않은 숫자였고, 4, 5번 합쳐 33개의 홈런을 칠 수 있는 타선은 충분히 무게감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더구나 팬들이 '마림포'라는 별명까지 붙여주었던 그 장거리포 콤비는 롯데 자이언츠 역사에서 원년 김용희-김용철의 '용용포' 이후 처음 가지는 중화기였다.

'용용포'를 대신한 중화기, '마림포'

▲ 임수혁을 부르는 팬들
ⓒ 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
96년에는 홈런이 11개로 주춤했지만, 타율을 3할1푼1리까지 끌어올려 그 해 자이언츠가 팀타율 1위를 기록하는데 한몫하기도 했다. 그리고 꾸준히 4할대 중반을 유지하는 장타율은 '소총부대'라거나 '똑딱이타선'이라는 조롱을 받던 팀에 요긴한 무기가 되어주곤 했다.

물론 96년에 무릎 부상을 당한 뒤로는 기나긴 부진에 빠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듬해인 97년에는 절반도 못되는 49경기에 나섰을 뿐이었고, 그 뒤로도 2할5푼 이상의 타율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그가 팬들의 기억 속에 커다란 존재감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고비 때마다 배신하지 않았던 그의 결정적인 한 방 때문이었다.

이미 그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던 95년. 결국 베어스 진필중의 신들린 피칭과 자이언츠 박정태의 뼈아픈 실책으로 6, 7차전을 내주며 우승컵을 넘겼지만, 그 해의 한국시리즈 5차전은 '클러치히터'라는 그의 이미지를 만든 계기였다. 그때까지 2승 2패로 맞선 채 패권의 결정적인 고비라고 여기며 나섰던 그 경기 연장 10회초에 임수혁은 중견수 앞으로 멀찍이 날아가는, 안타보다도 값진 희생플라이를 날려 승리를 결정지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성 라이온즈와 만났던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야구의 추억' 박정태 선수 편에서도 묘사된 적이 있는 그 경기다). 그 해 여전히 부상 후유증에 신음하며 규정타석도 채우지 못했던 임수혁은 롯데 자이언츠 역사상 가장 빛나는 순간의 한 장면에 우뚝 서게 된다.

1승 3패까지 몰렸다가 호세의 역전 스리런 홈런과 박석진의 7이닝 퍼펙트 투혼으로 5,6차전을 따내며 올라선 마지막 7차전. 무대는 적지인 대구였다. 치고 올라온 기세는 등등했지만 이미 한계에 도달한 체력과 긴장감에 먼저 두 점을 내주고 몇 번의 반격에 실패하며 불안감에 젖어들기 시작했던 6회 초, 한 점을 만회하는 홈런을 날린 호세에게 관중석에서 물병이 날아들었고 흥분한 호세가 관중석으로 배트를 집어던지는 '사고'를 치면서 사태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호세에게는 퇴장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고,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관중들과 선수들. 대구 야구장의 외야와 내야는 관중석에서 날아든 오물로 난장판이 됐고, 자이언츠 선수들은 덕아웃 뒤편에서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 순간, 혈기를 누르지 못하고 싸들었던 가방을 김명성 감독의 만류로 다시 풀어놓으며 '오늘만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주장 박정태의 투박한 일성을 되뇌며 나선 마해영이 보란 듯이 동점홈런을 날리고 포효했지만, 곧 이은 7회 수비에서 이미 탈진하다시피 했던 박석진이 김종훈, 이승엽에게 연속홈런을 두들겨 맞으며 다시 주저앉아야 했다. 그리고 다시 두 번 반격이 무기력하게 봉쇄되고 끈질기게 따라온, 정말 받아들이기 싫은 패배의 그림자가 눈앞을 가리던 9회 초였다.

고비 때마다 배신하지 않았던 그의 결정적인 한 방

▲ 임수혁 선수의 배번이 적힌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나선 팬
ⓒ 서민석
원아웃 주자 1루. 타순은 호세의 것이었지만, 그는 이미 퇴장당하고 없었다. 4차전 기사회생의 역전홈런과 7차전에서 앞선 6회의 만회홈런을 날려준 호세라면 혹 기대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자이언츠 팬들은 더욱 우울했다. 그 대신 타석에 들어선 것은 이미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었던 임수혁, 바로 그였다.

라이온즈 투수는 임창용. 당대 최고의 마무리였던 그 역시 상황의 중대함을 모르지 않았다. 비록 그 상황에서 강타자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임수혁의 결정적인 한 방을 의식하고 바깥쪽으로 빠지는가 싶은 공 한 개를 찔러 넣었다. 다른 건 몰라도 홈런만은 피해가겠다는 의지가 역력했다.

그러나 임수혁의 방망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망설임 없이 공의 궤도를 따라 돌았고, 그 당당한 체구에서 휘두른 시원한 스윙은 그대로 공을 결대로 밀어내 오른쪽 스탠드 중간에 꽂아버렸다. 동점 홈런. 불안감에 손톱을 물어뜯던 자이언츠 선수들이 덕아웃에서 튕겨나와 환호했고, 그걸로 기세싸움은 끝이 나버렸다.

10회말 만루 위기를 막아내고, 다시 11회 초에 결승타를 때려낸 김민재. 그리고 11회말에 등장해 라이온즈의 마지막 저항을 3연속 삼진으로 봉쇄한 주형광. 그렇게 롯데 자이언츠는 한국시리즈에 올라섰다.

비록 진저리쳐질 만큼 처절했던 그 7번의 격전에서 쌓인 피로를 극복하지 못하고 우승컵은 이글스에 내주었지만, 최동원의 4승 역투와 유두열의 역전홈런으로 들어올렸던 84년의 우승 못지않게 자이언츠 팬들이 떠올리며 가슴 뛰는 순간은 바로 그 해 그 경기였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순간의 가장 빛나는 점 하나를 찍은 것이 바로 임수혁이었다.

그 해를 끝으로, 롯데 자이언츠에는 길고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이듬해인 2000년 봄, '검은 갈매기' 호세가 미국으로 날아갔고, 임수혁이 쓰러졌다. 그리고 2001년에는 '마림포'의 다른 한 축이었던 마해영 역시 선수협의회 파동 뒤끝에 삼성 라이온즈로 떠밀려 보내졌고, '영원한 주장' 박정태는 2군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 사이 팀 역시 2000년 6위를 시작으로 2001년부터 2004년까지 기록적인 4년 연속꼴찌의 늪에서 헤매는 등 다시는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는 침체에 빠져들고 말았다.

롯데 자이언츠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너무나 미워하는 부산의 팬들. 그래서 '꼴데 팬이라고 놀림받는 것도 지겹다'며 돌아앉아서도 프로야구 중계가 있는 날이면 집나간 자식 시험발표라도 되는 듯 곁눈질하며 가슴 치는 그들은 쓸쓸하게 말하곤 한다. '임수혁의 저주'. 임수혁이 벌떡 일어나기까지 자이언츠는 절대 꼴찌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이다.

이제 그만, 일어나라 임수혁

▲ 병상의 임수혁
ⓒ 김진석
물론 그것은 임수혁이라는 한 사람에 대한 구부러지고 부풀려진 미신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임수혁이라는 상징으로 떠오르는, 팬들과 함께 타올랐던 너무나 아름다운 그 순간, 팀과 팬들을 위해 헌신했던 선수들에 대한 팬들의 사랑이며 고마움이며 그리움이다.

그래서 사직 경기장에서 롯데 자이언츠의 홈경기가 벌어지는 날이면, 그들은 임수혁의 얼굴이 새겨진 커다란 현수막을 펼쳐든 채 다시 경기장을 찾는다. 아직도 2루에서 후속타자의 적시타를 기다리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을 임수혁의 함성을 빌어, 또 그 처절했던 투혼의 이끌림을 따라 롯데 자이언츠의 후배 선수들이 깨어나 솟구쳐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며칠 있으면 스물여섯 번째 개막축포가 오를 것이고, 또 일곱 번째 '4월 18일'을 맞을 것이다. 그러면 야구장 그 파란 잔디 위로 피어오르는 화려한 봄기운 속에서 우리는 문득 허전함을 느낄 것이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2루주자가 홈플레이트에, 타석에, 그리고 가족의 품에, 팬들의 눈앞 곳곳에 남긴 커다란 빈자리 때문에 말이다.

이제 그만, 일어나라. 임수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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